눈이 구백 냥이라면

2025. 12. 7. 17:22장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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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심봉사, 그리고 헬렌 켈러

시각장애인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심봉사헬렌 켈러.

심봉사는 딸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자 눈을 뜨게 됩니다. 아름다운 효녀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시각장애인은 '눈을 떠야 행복해지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마치 시각장애 자체가 불행인 것처럼.

헬렌 켈러는 다릅니다.

생후 19개월에 성홍열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 앤 설리번 선생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언어를 배우고, 하버드 대학 부속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대학 학위를 받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말했습니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그녀는 장애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장애와 '함께' 살았습니다. 미국시각장애인협회를 만들고,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고, 노동자 권익을 위해 싸웠습니다. 35개국을 돌며 장애인 복지 개선을 호소했습니다.

1937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왔습니다. 경성에서 강연을 하고, 개성에 잠깐 정차하는 시간에도 강연을 했습니다.

88년의 생애 동안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바꿨습니다.

심봉사는 눈을 떠야 행복해졌습니다.
헬렌 켈러는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바꿨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시각장애인의 삶을 더 잘 보여줄까요?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

옛 속담입니다.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차지하는 비율은 80% 이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읽습니다. 글을 읽고, 사람 얼굴을 보고, 길을 찾고, 위험을 피합니다.

그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상상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

하지만 그건 편견입니다.


깜깜한 세계?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틀렸습니다.

국내 등록 시각장애인 중 **전맹(완전 실명)**은 약 **12%**에 불과합니다. 저시력 장애인들이 장애 등록을 꺼리는 특성까지 고려하면, 실제 전맹 비율은 6% 정도로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나머지 88% 이상은요?

  • 명암을 구분할 수 있거나
  • 희미하게나마 색깔을 구분할 수 있거나
  • 아주 가까운 것만 보이거나
  • 시야의 일부만 보이거나

완전히 깜깜한 세계에 사는 시각장애인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전맹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점자블록은 왜 노란색일까

길을 걷다 보면 노란색 점자블록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노란색일까요?

저시력 시각장애인에게 밝은 색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점자블록은 전맹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발로 느끼는 촉각 정보와 함께,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8년, 서울시가 '디자인 서울' 사업을 하면서 점자블록 색을 바꿨습니다. 도시 미관을 위해서. 검은색, 회색, 갈색 점자블록이 등장했습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노란 칠이 벗겨진 검은 점자블록. 보도블록과 구분이 안 되는 회색 점자블록.

"시각장애인은 어차피 안 보이니까 색은 상관없지 않아?"

이 생각이 만들어낸 참사입니다.


버스 한 번 타는 일

시각장애인에게 버스 타기는 모험입니다.

지하철은 그나마 낫습니다. 정해진 곳에 정차하고, 역 이름을 안내하고,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스는요?

자기가 탈 버스가 몇 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버스정류장 안내 단말기에서 음성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볼륨이 작아서 버스 소음에 묻힙니다. 스마트폰 앱을 쓸 수도 있지만, 앱에 표시된 순서대로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의 경우는요?

  • 러시아워에 버스가 3~4대 동시에 정차하면, 뒤에 있는 버스 번호를 볼 수 없습니다
  • 한적한 정류장에서 버스 번호를 확인하려고 서 있으면, 기사가 안 타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갑니다
  • 이미 지나간 버스를 부르거나, 오지도 않은 버스를 부르는 일이 허다합니다

버스 한 번 타는 일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을 건다

"이 땅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음향신호기가 있는 횡단보도는 전체의 일부입니다. 있어도 고장 난 경우가 많습니다.

공사장

어제까지 없던 공사 펜스가 길 한가운데 세워져 있습니다. 흰지팡이로 더듬어 가다가 부딪힙니다.

간판

가게에서 튀어나온 입간판. 눈높이에 있는 현수막. 저시력 시각장애인은 보이지 않아서, 전맹 시각장애인은 지팡이에 닿지 않아서 얼굴을 부딪힙니다.

자전거

인도에서 달려오는 자전거.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킥보드

전동킥보드는 더 위험합니다. 소리도 없고, 속도도 빠르고, 아무 데나 세워져 있습니다. 보행 중 킥보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일상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각장애인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1차적 어려움: 보행, 읽기, 일상생활의 불편

2차적 어려움: 사회적 편견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말합니다. 편견이 더 힘들다고.


편견들

"시각장애인은 외모에 신경 안 쓰겠지"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시각장애인 주인공이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었습니다.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왜 해?" "하이힐을 어떻게 신어?"

작가가 해명해야 했습니다. 철저한 자료조사의 결과물이라고.

시각장애인도 외모에 신경 씁니다. 거울을 보지 못해도,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씁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합니다. 옷을 고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은 다른 감각이 발달하겠지"

미디어의 영향입니다. 영화에서 시각장애인은 초인적인 청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소리만 듣고 누가 오는지 압니다. 바람 소리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현실은 다릅니다.

전맹 시각장애인은 촉각과 청각에 더 많은 집중력을 투자할 뿐, 감각 자체가 예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의 결과이지, 초능력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은 안마사나 하겠지"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이 가장 많이 하는 직업은 안마사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요?

정신과 의사, 상담가, 컴퓨터 기사, 변호사, 교사, 심지어 자동차 조립공까지.

직업에 제한을 두는 것은 시각장애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편견입니다.

면접에서 시각장애가 있다고 말하면?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습니다.


후천성 93.3%

시각장애인 중 93.3%가 후천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경우는 **6.7%**에 불과합니다.

원인은요?

  • 질환 53.3%: 당뇨망막병증, 녹내장, 황반변성, 백내장 등
  • 사고 36.8%: 교통사고, 산업재해, 외상 등

누구나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뇨가 있으면 눈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황반변성이 올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눈을 다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령화 시대입니다. 노화로 인한 시력 손상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잘 보이는 당신의 눈도, 내일은 모릅니다.


그래서 더 아픈 이야기

여기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사칭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걸 사기

흰지팡이를 들고 선글라스를 쓴 채 길거리에서 구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떠나면 멀쩡히 눈을 뜨고 돈을 셉니다. '종점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종점에서 구걸하던 시각장애인이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 집에 간다는.

실제로 1급 시각장애인으로 등록해 8년간 보조금 1억 원 이상을 챙긴 사람이 적발됐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들통이 났습니다.

성추행

더 악질적인 범죄도 있습니다.

"저 시각장애인인데 길 좀 안내해 주세요."

이렇게 접근해서 팔을 잡게 한 뒤 신체를 더듬는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려는 마음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절도

"지갑을 못 찾겠어요, 좀 도와주세요."

가방을 뒤지는 척하면서 금품을 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범죄자들 때문에 진짜 시각장애인들이 피해를 봅니다.

길에서 도움을 요청해도 "혹시 사기 아닐까?" 의심받습니다.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을 보면 "저것도 가짜겠지" 생각합니다.

실제 시각장애인 중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런데 가짜들 때문에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의심받습니다.

사칭 범죄자들은 시각장애인을 두 번 죽입니다. 한 번은 그들의 명예를, 한 번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비(備)장애인에게 드리는 말씀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비장애인"의 '비(非)'를 **'예비 비(備)'**로 해석합니다.

비장애인 = 예비 장애인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

그 구백 냥을 잃는다는 것.

생각만 해도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잃은 사람들도 있고, 점점 잃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옵션입니다.

  • 노란색 점자블록이라는 옵션
  • 음향신호기가 작동하는 횡단보도라는 옵션
  • 버스 번호를 알려주는 시스템이라는 옵션
  •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는 옵션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길에서 흰지팡이를 든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스정류장에서

"몇 번 버스 타세요?"

이 한마디면 됩니다. 원하는 버스가 오면 알려주세요.

길을 건널 때

"함께 건너가실래요?"

팔꿈치를 살짝 내밀어 주세요. 등을 밀거나 흰지팡이를 잡아당기면 안 됩니다.

식당에서

"12시 방향에 밥, 3시 방향에 국, 6시 방향에 반찬이 있습니다."

시계 방향으로 설명해 주세요.

물건을 건넬 때

직접 손에 건네주세요.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만 하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

먼저 말을 걸어주세요.

시각장애인은 누가 옆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용히 다가가면 깜짝 놀랍니다. 먼저 "안녕하세요" 한마디 해주세요.


옵션이 필요합니다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입니다.

눈이 구백 냥이라면, 그 구백 냥을 잃은 사람에게는 다른 옵션이 필요합니다.

점자라는 옵션. 음성 안내라는 옵션. 확대경이라는 옵션. 안내견이라는 옵션. 그리고 무엇보다, 편견 없는 시선이라는 옵션.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보이는 사람을 위한 옵션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한 옵션도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 내필션 |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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