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4. 21:36ㆍ장애에 대해서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이 병의 이름들
이 병에는 여러 이름이 있었습니다.
지랄병.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입니다. 발작하는 모습이 '지랄한다'는 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흥분하면 "지랄하네"라고 합니다.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 채.
간질(癎疾).
한자로 '미칠 간(癎)'에 '병 질(疾)'입니다. '미친 병'이라는 뜻입니다.
귀신병.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심히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구르며 거품을 흘린다."
간질은 성경에서 귀신 들린 현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는 병. 수천 년 동안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2009년, 대한간질학회는 병명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뇌전증(腦電症).
'뇌의 전기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2012년부터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천 년 동안 쌓인 편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뇌전증이란
뇌전증은 뇌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과도하게 흥분하면서 발작이 반복되는 질환입니다.
정신질환이 아닙니다. 뇌의 전기 신호 이상입니다.
전염병이 아닙니다. 옆에 있다고 옮지 않습니다.
유전병도 아닙니다. 일반인보다 유전 가능성이 4~5% 높은 정도입니다.
전 세계 약 5천만 명이 뇌전증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30~40만 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00명 중 1명꼴입니다.
그런데 이 중 20~30%만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편견이 무서워서 병원에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발작과 함께 사는 일상
뇌전증 발작은 다양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쓰러져서 온몸을 떠는 '대발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 갑자기 5~10초간 멍해지는 '결신발작'
- 손가락만 살짝 떨리는 발작
- 입술을 씰룩거리는 발작
- 갑자기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발작
본인도 모르게 지나가는 발작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이 "왜 갑자기 멍했어?"라고 물어봐야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발작이 올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 일상을 지배합니다.
집 안의 가구를 줄입니다
발작이 오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바닥에, 벽에, 가구에 부딪힙니다. 멍이 들고 타박상을 입습니다.
그래서 뇌전증 환자들은 집 안 가구를 최소화합니다. 모서리가 날카로운 가구는 치웁니다. 넘어져도 덜 다치도록.
혼자 목욕을 못 합니다
욕조에서 발작이 오면 익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목욕하지 않습니다.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요리를 조심합니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발작이 오면 화상을 입습니다. 끓는 물이 쏟아지면 큰일입니다.
계단을 피합니다
계단에서 발작이 오면 굴러떨어집니다.
수영을 못 합니다
물속에서 발작이 오면 익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
뇌전증은 보이지 않는 장애입니다.
발작이 없는 평소에는 누가 봐도 '멀쩡한 사람'입니다.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약만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가끔 쓰러지는 거잖아."
맞습니다. 약 70%의 환자는 약물치료로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일상생활'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합니다
-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 잠을 푹 자야 합니다. 수면 부족은 발작을 유발합니다
- 깜빡이는 조명을 피해야 합니다
-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됩니다
- 언제 발작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 3명 중 1명은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겪고 있습니다.
환자 가족 약 200만 명은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가족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반복해서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인지.
취업의 벽
뇌전증 환자에게 가장 큰 벽은 취업입니다.
국내 사업장 조사 결과, 뇌전증 환자 고용 경험이 있는 기업은 **7.9%**에 불과했습니다. 해외의 26%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입니다.
법적으로 뇌전증 환자는 일부 직업에 제한을 받습니다.
- 운전직 공무원
- 경찰 공무원
- 소방 공무원
운전 중 발작이 오면 사고가 나니까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법적 제한이 없는 직업에서도 취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면접에서 뇌전증이 있다고 말하면?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병을 숨깁니다. 취업 후 발작이 일어나면? 해고됩니다.
이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뇌전증이 발병한 경우에도 실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숨기고 싶은 병
뇌전증 환자들은 병을 숨깁니다.
취업할 때 숨기고, 결혼할 때 숨기고, 친구들에게 숨깁니다.
왜?
"저 사람 간질이래."
이 한마디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뇌전증을 '간질'이라 부르고, '지랄병'이라 부르고, '귀신 들린 병'이라 생각합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뇌전증은 정신과에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 아니냐"는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지금은 신경과에서 치료하지만, 편견은 여전합니다.
한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에 하늘이 원망스럽고 차라리 죽고 싶다."
병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편견이 힘든 것입니다.
발작하는 사람을 보면
길에서 누군가 발작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당황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발작은 몇 분 내에 자연히 멈춥니다.
- 위험한 물건을 치워주세요. 머리가 부딪힐 수 있는 것들.
-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세요. 구토물에 질식하지 않도록.
- 입에 아무것도 넣지 마세요. 혀를 깨물까봐 손가락이나 수저를 넣는 것은 위험합니다.
- 억지로 붙잡지 마세요. 경련을 멈추게 하려고 누르면 오히려 다칩니다.
- 5분 이상 지속되면 119에 연락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쳐다보지 마세요. 발작이 끝난 후 정신이 돌아왔을 때, 주변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쳐다보고 있으면 그것이 가장 큰 수치심이 됩니다.
나도 뇌전증이 있었습니다
고백합니다.
나도 뇌전증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였을 겁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거품을 물고 몸을 떨었다고 합니다. '다고 합니다'라고 쓰는 이유는, 나는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전신긴장간대발작. 흔히 말하는 '대발작'이었습니다.
처음 발작을 하고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약을 지어 먹었습니다. 나에게는 그 약이 옵션이었습니다. 필요한 옵션.
약을 먹으면서도 3~4번 정도 더 발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주 한 건 아니었습니다.
6개월 후 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약은 다시 볼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뇌전증 환자 중 절반 정도는 약을 끊어도 재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 절반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 사람들의 눈빛.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바닥에 누워 있던 그 느낌.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뇌전증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왔었으니까요.
비(備)장애인에게 드리는 말씀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비장애인"의 '비(非)'를 **'예비 비(備)'**로 해석합니다.
비장애인 = 예비 장애인
뇌전증은 어느 연령에서든 발병할 수 있습니다.
- 영유아기: 선천성 기형, 출산 시 뇌손상
- 청장년기: 교통사고, 외상
- 노년기: 뇌졸중, 뇌종양
특히 60세 이상 노년층에서 발병률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오늘 건강한 당신도, 내일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 뇌졸중이 올 수 있습니다.
10년 후 뇌종양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뇌전증 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간질이래"라는 수군거림이 얼마나 아픈지.
취업이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지.
발작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얼마나 큰지.
이름이 바뀌어도
2012년, '간질'이 '뇌전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바꾼다고 편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여전히 "귀신 들린 자"로 쓰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랄한다"고 말합니다.
기업들은 여전히 뇌전증 환자를 뽑지 않습니다.
뇌전증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닙니다.
- 병을 숨기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는 사회
- 발작을 해도 해고되지 않는 사회
- "간질이래"라는 말이 더 이상 낙인이 되지 않는 사회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싶은 것입니다.
퍼플데이(Purple Day)
매년 3월 26일은 뇌전증 인식 개선의 날, '퍼플데이'입니다.
2008년, 뇌전증을 앓던 캐나다 소녀 캐시디 메간이 시작했습니다. 보라색 옷을 입자고 제안한 것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보라색은 뇌전증 증상 억제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라색 옷을 입음으로써 **"나는 뇌전증 환자를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올해 3월 26일, 보라색 옷을 입어보시겠습니까?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뇌전증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옵션입니다.
- 발작이 있어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옵션
- 병을 밝혀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라는 옵션
- 천 년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옵션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식이 바뀔 차례입니다.
✍️ 내필션 |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장애에 대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눈이 구백 냥이라면 (0) | 2025.12.07 |
|---|---|
| 120cm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2) | 2025.12.05 |
| 대한민국 장애 유형 16가지 (0) | 2025.12.03 |
| 뇌병변 장애, 그 이름 뒤에 숨은 사람들 (0) | 2025.12.03 |
| 뇌성마비,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0) | 2025.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