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8. 11:05ㆍ에세이
대림절에 부쳐
1.
11월의 끝자락, 세상은 분주해진다.
거리마다 반짝이는 조명이 걸리고, 사람들은 선물을 고르느라 바쁘다. 캐럴이 흘러나오고, 모두가 '곧 온다'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오는 걸까.
대림절(Advent). 라틴어 'Adventus'에서 온 이 말은 단순히 '오다'가 아니라 **'도착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마침내 도착하는 것. 그래서 대림절은 축제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이다.
나는 이 계절이 되면 늘 생각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2.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확신 없는 기다림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 버스가 올까, 답장이 올까, 내일은 나아질까. 이런 기다림은 불안을 낳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흔들리고, 어느 순간 '아, 안 오는구나' 하고 포기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확신 있는 기다림이다.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면서 기다리는 것. 해가 뜬다는 것을 알기에 밤을 견디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겨울을 버틴다. 이 기다림은 불안이 아니라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품이 된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후자다.
오신다. 반드시 오신다.
이 확신이 2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탱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고 있다.

3.
나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어느 날 길에서 발견되어, 천주교가 운영하는 시설에 맡겨졌다. 외롭고 고독한 나날이 이어졌다.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고, 누군가 데리러 올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오후,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왔다는 그들은 기타를 치며 찬양을 불렀다. 그리고 그 뒤로 주일마다 다시 찾아와 우리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그때 함께 불렀던 찬양 중에 이런 곡이 있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사야 11장 6절에서 9절의 말씀을 담은 노래였다. 황량한 땅이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하고, 맹수가 어린 양과 뛰놀고, 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세상. 사랑이 가득한 이상향.
어린 나는 그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다.
정말 저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
4.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는 맞으면서 컸다. 시설에서 나는 샌드백이었다. 인권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홉 살이 되어 기독교가 운영하는 시설로 옮겨졌다. 찬양 때문에 교회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구타는 더 심했다. 하루도 안 맞은 날이 없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는 그 괴로움을 기도로 풀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는, 길을 가다 5원도 줍고 10원도 주웠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그것을 헌금으로 바쳤다.
문제는 주머니였다. 내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나는 한 손만 쓸 수 있다. 그때는 밥도 내 손으로 떠먹었다. 그럼 주운 돈은 어디에 뒀을까.
왼손에 꼭 쥐고 있었다.
지금은 손이 많이 유연해졌지만, 그때는 뻣뻣하고 힘이 셌다. 그래서 가능했다. 며칠이고 동전을 꼬옥 쥔 채 버텼다. 그리고 예배 시간, 헌금할 때가 되면 오른손에 조용히 넘겨주었다.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쥐고 있을 힘이 있었다는 것. 넘겨줄 손이 있었다는 것. 바칠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5.
어린 시절의 나는 대림절이 뭔지 몰랐다.
크리스마스가 뭔지는 알았다. 산타클로스가 온다는 날. 하지만 나에게 선물을 주는 산타는 없었다. 성탄절이 예수님의 생일이라는 것, 대림절이 그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 그걸 알아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그때의 나에게 '기다림'은 희망이 아니었다. 기다려봤자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워버렸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찬양만은 잊히지 않았다.
사막이 꽃동산 되리.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현실은 사막이었다. 아니, 사막보다 못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정말로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았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내 최초의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6.
훗날 성경을 읽다가 이사야서 9장을 만났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
'있던'이 아니라 '행하던'이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무언가 풀렸다.
나도 걸어가고 있었구나.
맞으면서도, 굶으면서도, 동전을 쥐고 있으면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걸어가고 있었구나.
그리고 빛은, 그렇게 걸어가는 자에게 비추는 것이었다.
7.
대림절에 우리는 네 개의 초를 켠다.
첫째 주는 예언의 초. 오실 것이라는 말씀. 둘째 주는 베들레헴의 초. 낮은 곳에 오신다는 약속. 셋째 주는 목자의 초.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이들. 넷째 주는 천사의 초. 기쁨의 선포.
한 주에 하나씩, 어둠 속에 빛이 늘어간다.
나는 이 느린 속도가 좋다.
한꺼번에 환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밝아지는 것. 당장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아도, 오늘 하나의 빛이 켜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세상은 빠른 것을 좋아한다. 즉시, 바로, 지금 당장. 하지만 은혜는 종종 느리게 온다. 한 주, 또 한 주. 한 걸음, 또 한 걸음.
기다림이란 그 느림을 견디는 힘이 아니라, 그 느림 속에서 자라나는 힘이다.
8.
올해 대림절, 나는 다시 그 찬양을 떠올린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내 삶은 여전히 사막 같은 날이 많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막이 꽃동산이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방울의 샘물이 고이고, 또 고이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야 꽃이 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니, 기다리면서 걸어가는 것이다.
동전 하나 쥐고 버티던 어린 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1:5
어둠이 깨닫지 못해도 빛은 비친다. 그것이 대림절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다.
기다림은 무력함이 아니다. 기다림은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걸음 위에, 은혜는 이미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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