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0. 14:00ㆍ소설
🎄 [성탄 특집] 현대판 스쿠루지 - 마지막 크리스마스
제4장. 영철의 마지막 선물

택시 안에서 황석진은 평생 하지 않던 짓을 했다. 기도.
'제발... 제발 늦지 않게 해주세요...'
누구에게 하는 기도인지도 몰랐다. 그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었다. 종교는 약자들의 위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간절히 빌고 있었다.
서울대병원 호스피스 병동.
영철의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중년의 여자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석진 회장님이세요?"
"네, 제가 황석진입니다."
"저는 박민정이에요. 아버지 딸이요."
여자의 눈가가 붉었다. 울다 지쳐서 마른 눈물 자국이 보였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세요.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오셨어요. 회장님을 보고 싶어하세요."
황석진은 병실 문을 밀었다.
병실은 작고 조용했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에 영철이 누워 있었다. 꿈에서 본 것처럼 야윈, 뼈만 남은 모습.
하지만 눈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황석진을 알아보았다.
"석진아..."
그 목소리가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황석진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영철의 손을 잡았다.
"영철아... 미안해. 어제 왜 못 왔냐면..."
"됐어."
영철이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왔잖아. 그것만으로... 됐어."
"영철아..."
"석진아,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어린 시절부터... 넌 특별했거든. 눈빛이 달랐어. 성공할 놈이었지."
"뭔 소리야. 내가 너한테 한 짓이 있는데..."
"알아." 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 근데... 원망 안 해. 진심으로."
황석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어떻게 원망을 안 해. 내가 네 인생을 망쳐놓았는데..."
"아냐." 영철의 손이 황석진의 손을 꽉 쥐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거야. 너를 믿기로 한 것도, 그 뒤에 어떻게 살지도... 다 내 선택이었어."
"영철아..."
"석진아,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영철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뭐?"
"내가 미안해. 그때... 네가 날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화낼 때... 난 네 입장을 이해하려고 안 했어. 넌 살아남으려고 한 것뿐인데... 난 배신이라고만 생각했어."
"그건..."
"아냐, 들어. 석진아, 넌 어린 시절부터 두려웠을 거야. 가난이, 배고픔이, 무력함이. 그래서 돈에 집착한 거고, 성공에 목숨 건 거야. 난... 그걸 이해했어야 했어."
황석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근데 석진아..." 영철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괜찮아. 넌 충분히 성공했잖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
"가족한테 돌아가. 아들한테, 손주한테. 그게 진짜 부자야. 돈이 많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진짜 부자인 거야."
"영철아... 나 어떻게 해야 해.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영철이 웃었다. 얼굴 가득 주름이 잡히며 환하게 웃었다.
"쉬워. 그냥... 미안하다고 해. 사랑한다고 해. 그거면 돼."
"그게... 되는 거야?"
"응. 그게 되는 거야. 나도... 너한테 그러잖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네가 내 친구여서."
영철의 손이 떨렸다. 힘이 빠지고 있었다.
"영철아!"
"석진아... 다음 생에서 보자. 그때는... 우리 처음부터 다시 하자..."
영철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영철아! 영철아!"
기계가 삐- 하는 소리를 냈다. 의료진이 달려왔다.
황석진은 친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의료진이 그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는 버텼다.
"영철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평생 하지 않던 말. 진심으로 하지 않던 말. 그 말을 이제야, 너무 늦게야 하고 있었다.
병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해가.
황석진은 병원 로비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철의 딸 민정이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았다.
"회장님."
"..."
"아버지가... 회장님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어린 시절 얘기, 함께 꿈꾸던 얘기. 회장님을 원망한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으셨어요."
"알아요." 황석진이 힘없이 말했다. "그래서 더... 미안해요."
"아버지가 남긴 게 있어요."
민정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뭔가요?"
"열어보세요."
황석진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과 편지가 있었다.
사진은 두 소년의 사진이었다. 열 살쯤 된 두 아이가 찢어진 바지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어린 석진과 영철.
편지를 펼쳤다.
석진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난 이미 갔을 거야. 근데 걱정 마. 난 아프지 않아. 그리고 너도 아프지 마.
나 평생 네가 부러웠어. 머리도 좋고, 야망도 있고, 뭐든 이뤄내는 너. 근데 알아? 난 그것보다 네가 무서웠어.
석진아, 넌 무서워서 달리는 놈이야. 멈추면 뒤처질까 봐, 뒤처지면 다시 가난해질까 봐. 평생 그렇게 달렸잖아.
근데 이제 좀 멈춰. 뒤돌아봐. 네가 달려온 길에 뭐가 있는지. 누가 있는지.
아직 늦지 않았어. 난 분명히 알아.
석진아, 우리 어린 시절 기억나?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은데, 네가 고구마 반 개 나눠줬잖아. 그때 난 생각했어. '이 녀석은 착한 놈이구나. 나중에 크면 좋은 사람 되겠다.'
석진아, 그 착한 네가 아직 거기 있어. 묻혀 있을 뿐이야. 그걸 꺼내.
그리고... 내 대신 오래 살아줘. 좋은 사람으로. 그게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안녕, 친구야.
영철이가.
황석진은 편지를 가슴에 안고 울었다.
병원 로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에서, 일흔두 살의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성준이었다.
"아버지?"
"..."
"아버지, 저 성준이에요.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황석진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성준아."
"네, 아버지."
"나... 지금 어디냐?"
"집이에요. 민서랑 민준이랑 같이..."
"거기로 갈게."
"예...?"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가족이... 같이 있어야지."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
"아버지... 진짜요...?"
"그래. 지금 출발할게."
황석진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제5장. 세 번째 영혼: 미래의 그림자]
© 2025 현대판 스쿠루지 - 마지막 크리스마스 | 원작: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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