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9. 12:48ㆍ소설
🎄 [성탄 특집] 현대판 스쿠루지 - 마지막 크리스마스
제1장. 어둠 속의 제국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한강을 내려다보는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유리로 뒤덮인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성진그룹' 본사. 그 꼭대기 층 회장실에서 일흔두 살의 황석진은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2월 23일 밤.
도시는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반짝였지만, 그의 눈에 그것은 그저 전기 낭비에 불과했다. 황석진은 냉소를 머금으며 두꺼운 서류철을 펼쳤다.
"올해 연말 성과급 지급 계획서입니다, 회장님."
비서실장 김정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십 대 중반의 그는 이십 년 넘게 황석진 곁을 지켰지만, 여전히 이 노인 앞에서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성과급?" 황석진이 안경 너머로 서류를 훑었다. "작년 대비 매출이 3% 하락했는데 무슨 성과급이야."
"하지만 회장님,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 3% 하락이면 선방한 것입니다. 경쟁사들은 10% 이상..."
"남들이 망하고 있으니까 우리도 괜찮다? 그런 논리로 사업하다간 다 굶어죽어."
황석진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
"올해 성과급은 삭감이야. 50%."
"예...?"
"들렸잖아. 50% 삭감. 그리고 내년 1분기에 인원 감축 계획 세워놔. 전체 인력의 15%."
"회장님, 그건 너무..." 김정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런 발표를 하면..."
"크리스마스가 뭐 어때서?"
황석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회의실을 갈랐다.
"그게 무슨 대단한 날이라고. 서양에서 들어온 상술일 뿐이야. 선물 사고 파티하고... 다 낭비야.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직원들 사기가..."
"사기?" 황석진이 비웃었다. "사기로 밥이 나와? 돈이 나와? 회사가 살아야 직원들도 사는 거야. 내가 이 회사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는 창가로 걸어가 다시 야경을 바라보았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왔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 내 힘으로, 내 피와 땀으로. 그런데 요즘 젊은 것들은 뭐야? 워라밸? 복지? 웃기지도 않아."
김정태는 입을 다물었다. 이십 년 동안 봐왔지만, 황석진이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굳어지고, 더 차가워지고, 더 외로워지고 있었다.
"나가봐. 내일 아침까지 감축안 정리해서 올려."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정태가 물러나자 황석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거대한 회장실, 값비싼 가구들, 유명 화가의 그림들... 그 모든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성준(아들)'이라는 글자가 떴다. 황석진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아버지, 저 성준이에요."
"그건 알아. 용건이 뭐냐고."
전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가족들이 다 모이기로 했는데... 아버지도 오시면 안 될까요?"
"바쁘다."
"아버지, 손자들이 할아버지 보고 싶어해요. 민서가 이번에 피아노 대회에서 상 받았는데 할아버지한테 보여드리고 싶대요."
"바쁘다고 했잖아."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성준아." 황석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끊었다. "니가 이 회사를 물려받기 싫다고 나갔을 때, 난 더 이상 가족 놀이는 안 한다고 했어. 기억 안 나?"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전화가 끊겼다. 황석진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성준. 그의 유일한 아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건만, 그 아이는 아버지의 회사를 거부했다. 대신 작은 사회적 기업을 차려서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다고 했다.
"바보 같은 놈."
황석진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는 분노만이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아니면 후회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황석진 회장님이시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이 지긋한 듯했다.
"누구요."
"오래전 친구입니다. 박영철이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황석진의 손이 멈췄다. 박영철. 그 이름은 오십 년이라는 세월의 먼지를 뚫고 그의 기억 속에서 튀어올랐다.
"영철이...?"
"맞습니다. 오래됐죠. 거의 오십 년... 만이군요."
"너 지금 어디야? 어떻게..."
"석진이, 나 병원이야. 서울대병원. 시간이 별로 없어서... 한 번만 보자. 꼭."
전화가 끊겼다.
황석진은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박영철.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그 친구. 함께 배고픔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꾸었던 그 시절의 유일한 친구.
그를 버린 것도, 잊은 것도... 다 자신이었다.
[계속: 제2장. 첫 번째 영혼: 과거의 거울]
© 2025 현대판 스쿠루지 - 마지막 크리스마스 | 원작: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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