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8. 22:03ㆍ소설
현대판 성냥팔이 소년
장편소설 | 내필션
프롤로그
어둠 속에서 가장 작은 불빛도 의미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성탄 전야. 서울의 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명동 거리는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캐럴과 어우러져 흘러다녔다. 누군가에게 이 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축복의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외로운 밤이었다.
열여섯 살 소년 민준이에게, 이 밤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에게 성탄절은 그저 생존해야 하는 또 하나의 밤일 뿐이었다.
손가락 끝이 시려왔다. 낡은 운동화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이 발끝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가방 안에는 아직 스무 개의 손난로가 남아 있었다. 오늘 밤 안에 다 팔아야 했다. 그래야 내일 아침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
"손난로요! 따뜻한 손난로!"
그의 목소리는 축제 분위기에 묻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그를 귀찮다는 듯 피해 갔고, 누군가는 아예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걸어갔다.
민준은 생각했다. 나는 투명인간인가 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투명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라는 걸. 이 화려한 밤에, 그의 존재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한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민준은 얇은 점퍼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손난로 하나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팔아야 할 물건이었다. 자신의 따뜻함은 나중 문제였다.
그때,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왔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었다.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마치 별처럼 빛났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주 추운 밤, 한 아이에게 천사가 내려왔단다."
보육원 선생님이 들려주던 성탄절 이야기였다. 그때의 민준은 천진난만하게 물었었다.
"저한테도 천사가 올까요?"
선생님은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사는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간단다."
지금의 민준은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천사도, 기적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현실은 차갑고 냉혹했다. 오늘 밤 손난로를 다 팔지 못하면, 내일은 또 굶어야 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혔다가 이내 새 눈에 덮여 사라졌다. 마치 그의 존재처럼.
하지만 그날 밤, 민준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영원히 바꿀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제1부: 얼어붙은 세상
1장. 보육원을 떠나다

민준이 보육원을 떠난 것은 세 달 전이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그 날, 원장 선생님이 불렀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민준의 앞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양복을 빳빳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민준아, 인사드려. 이분이 너의 새 위탁 가정 아버지시란다."
민준은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열여섯 년 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드디어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민준을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서 민준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 예감을 무시했다.
위탁 가정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지옥이었다. 남자에게 민준은 자식이 아니라 노동력이었다. 위탁 수당을 받으면서 공짜 노동을 부릴 수 있는 도구였다.
"야, 창고 정리해. 끝나면 가게 청소."
남자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했다. 민준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다. 학교는 커녕,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다. 남자의 아내는 아예 민준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저기, 굴러온 돌 치워."
그녀가 민준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굴러온 돌'. 그 말이 칼처럼 가슴에 박혔다.
어느 날 밤, 남자가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민준을 때렸다.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다. 코피가 터지고, 온몸에 멍이 들었다.
"네가 뭔데 밥을 쳐먹어? 돈 벌어오기나 해, 이 쓸모없는 놈아!"
그 밤, 민준은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기로.
새벽 세 시,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민준은 집을 나섰다. 가진 것이라곤 낡은 가방과 얼마 안 되는 옷가지뿐이었다.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9월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민준은 벤치 위에 웅크린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해방감이 뒤섞였다.
최소한 여기선 맞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2장. 생존의 방법

거리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민준은 서울역 주변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어른도 있었고, 민준처럼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노숙인 쉼터의 존재도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열여덟 살 이상만 받았다. 민준은 아직 열여섯이었다.
"신분증 있어?"
먼저 말을 건 건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름은 정호. 그도 한때 보육원 출신이었다고 했다.
"없어요."
"그럼 일자리도 못 구해. 신분증 없으면 편의점 알바도 안 돼."
민준은 막막해졌다. 정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이거 팔아봐."
정호가 건넨 것은 손난로 한 박스였다. 동대문 시장에서 싸게 떼어온 것이라고 했다.
"개당 천 원에 팔면 돼. 원가가 오백 원이니까, 하나 팔 때마다 오백 원 남는 거야. 백 개 팔면 오만 원. 며칠 버틸 수 있어."
민준은 그렇게 손난로 장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배고픔 앞에서 자존심은 사치였다.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손난로를 팔았다.
"손난로요! 따뜻한 손난로!"
열 시간을 돌아다녀도 열 개를 팔기 어려운 날이 많았다. 그래도 민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자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사람들이 손난로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명동이나 홍대 같은 번화가에서는 하루에 이삼십 개까지 팔 수 있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왔다.
3장. 가장 추운 밤

12월 24일,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기상청은 영하 15도를 예보했다. 바람까지 불면 체감 온도는 영하 20도를 넘을 것이라고 했다. 뉴스에서는 한파 경보가 발령되었다며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다.
하지만 민준에게 '외출을 자제할' 집이 있었던가.
그는 평소보다 두 배의 손난로를 가방에 넣었다. 성탄절 전야에는 사람이 많을 터였다. 오늘만 잘하면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명동에 도착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었고, 가족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캐럴이 흘러나왔고, 상점마다 화려한 조명이 빛났다.
민준은 거리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손이 시려왔지만, 장갑을 끼면 물건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는 손을 호호 불며 참았다.
"손난로요! 따뜻한 손난로!"
예상대로 오늘은 장사가 잘 됐다. 해가 지기 전에 벌써 이십 개를 팔았다. 민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해가 지자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모두 따뜻한 식당으로, 카페로, 집으로 향했다. 거리는 금세 한산해졌다.
밤 여덟 시가 되자, 거리에는 민준 혼자만 남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얇은 점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추위였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손끝이 저렸다. 발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민준은 가방을 열어 남은 손난로를 세어보았다. 스무 개. 아직 절반이 남았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명동 대성당 앞. 성탄 미사에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성당까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매서운 바람에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흩날리던 눈이 점점 굵어졌다.
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미사가 한창이었다.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밖까지 흘러나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민준은 성당 계단 아래에 서서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보육원에서의 성탄절을 떠올렸다. 선생님들이 작은 케이크를 나눠주셨다. 아이들이 함께 캐럴을 불렀다. 그때는 그것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파티를 한다는데, 자신들은 고작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행복했다.
최소한 그때는 춥지 않았으니까. 배고프지 않았으니까. 곁에 사람이 있었으니까.
눈물이 났다. 얼어붙은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민준은 소리 없이 울었다.
왜 나만 이런 걸까. 무엇을 잘못한 걸까. 왜 나에게는 가족이 없는 걸까.
그때, 성당 문이 열렸다. 미사가 끝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준은 재빨리 눈물을 닦고 손난로를 꺼냈다.
"손난로요! 따뜻한 손난로!"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지나쳤다. 미사를 마친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따뜻한 곳으로 향했다. 누구도 눈 속에 서 있는 소년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곧 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민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눈이 자꾸 감겼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잠들면 안 되는데.
하지만 피로와 추위가 의지를 앞섰다. 민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아이, 괜찮아요?"
제2부: 작은 불빛
4장. 낯선 손길

"이 아이, 괜찮아요?"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어머, 손이 이렇게 차가워. 큰일 날 뻔했네."
누군가 민준의 손을 감쌌다. 따뜻했다. 그 온기에 민준은 간신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니?"
눈앞에 한 여성이 있었다. 쉰 살쯤 되어 보였다. 따뜻해 보이는 눈과 선한 미소. 그녀의 뒤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불빛이 후광처럼 비쳤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경계심이 올라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괜... 찮아요."
입술이 얼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괜찮긴. 이렇게 추운 데서 뭘 하고 있었어?"
민준은 바닥에 흩어진 손난로를 보았다.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는 황급히 주우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난로... 팔아야 해요..."
여성의 눈에 슬픔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내가 다 살게. 몇 개야?"
"네?"
"남은 거 다 살게. 그러니까 일단 따뜻한 데로 가자. 이러다 큰일 나겠어."
민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늘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 이 낯선 여자가 왜 자신을 돕는 걸까.
"왜... 그러세요?"
여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글쎄, 왜일까. 어쩌면 오늘이 성탄절이라서? 아니면..."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눈앞에서 추운 아이를 보고 지나칠 수 없어서?"
민준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낯선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손의 온기는 진짜였다.
"자, 일어날 수 있겠어?"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민준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기억 속 어딘가에서 느꼈던 것처럼 따뜻했다.
5장. 따뜻한 밥상

여성의 이름은 정순자였다. 명동 근처에서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와. 추운데 이야기는 안에서 하자."
분식집은 작고 허름했지만, 따뜻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가 보였다. 라면이었다.
"배고프지? 일단 먹어."
정순자는 묻지도 않고 라면 한 그릇을 끓여주었다. 김치와 단무지도 한 접시 내놓았다.
민준은 어쩔 줄 몰랐다. 언제 이렇게 따뜻한 밥상 앞에 앉아봤던가. 손이 떨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안 먹어? 맛없어?"
"아뇨, 그게..."
민준은 젓가락을 들었다. 첫 입을 삼키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왜 우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눈물이 났다.
정순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체해."
그 목소리에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민준은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먹었다. 눈물과 함께.
라면을 다 먹고 나자, 정순자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민준이요."
"민준이. 좋은 이름이네. 몇 살이야?"
"열여섯이요."
정순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열여섯... 학교는?"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정순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어."
"네?"
"나도 부모 없이 자랐어. 고아원에서. 그때는 보육원이란 말도 없었지." 정순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시절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더라."
민준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자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거다.
"그래서 네가 보였어." 정순자가 말했다. "성당에서 나오다가, 계단 아래 서 있는 네가 보였어. 예전의 내가 보이는 것 같았어."
민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같은 아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렴." 정순자가 말했다. "내일 이야기하자. 성탄절 아침에 혼자 있으면 안 되잖아."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서.
6장. 성탄의 아침

민준은 오랜만에 따뜻한 잠을 잤다.
분식집 안쪽 작은 방에 이불을 깔아주었다. 낡았지만 깨끗한 이불이었다. 바닥은 보일러로 따뜻했다. 민준은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맛있는 냄새가 났다.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였다.
"일어났어?" 정순자가 웃으며 말했다. "손 씻고 와. 밥 먹자."
밥상에는 된장찌개, 계란말이, 김치, 그리고 따끈한 흰 쌀밥이 놓여 있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밥상이었다.
"성탄절 아침인데, 특별한 건 없어. 미안해."
"아뇨, 아뇨..." 민준이 손을 저었다. "이게 제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특별해요."
정순자가 웃었다. "뭘 그런 말을. 많이 먹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순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열여덟에 고아원을 나왔어.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지. 학벌도, 돈도, 연줄도. 공장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온갖 궂은일 다 했어."
"힘드셨겠어요."
"힘들었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 그러다 좋은 사람 만났어. 남편이야. 그 사람도 고아원 출신이었거든." 정순자가 미소 지었다. "서로의 아픔을 알았으니까, 서로를 더 아낄 수 있었어."
"지금 어디 계세요?"
정순자의 눈에 잠깐 그늘이 스쳤다.
"5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어. 갑자기."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줬으니까." 정순자가 다시 웃었다. "그 사람 떠나고, 이 가게를 시작했어. 혼자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민준은 조용히 들었다. 이 사람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민준아." 정순자가 불렀다.
"네."
"너, 여기서 일해볼 생각 없어?"
민준은 젓가락을 멈추었다.
"무슨..."
"혼자 하기 힘들었어. 주방일도 있고, 서빙도 있고. 마침 사람이 필요했는데, 어때?"
민준은 말문이 막혔다.
"저... 신분증도 없는데요."
"그건 나중에 어떻게든 해보자. 일단은 여기서 지내면서 일 배워. 방도 있으니까 여기서 자도 돼."
민준은 믿을 수 없었다. 어제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일자리도 생기고, 잠잘 곳도 생겼다.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정순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녹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옛날에,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거든." 그녀가 말했다. "고아원 나와서 막막할 때, 어떤 아주머니가 밥을 사줬어. 그냥, 이유 없이. 그 한 끼가 내 인생을 바꿨어. 포기하려던 걸,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생각하게 됐거든."
"..."
"그 아주머니한테 받은 걸 갚을 방법은 없어.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갚으려고." 정순자가 민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중에 힘이 생기면, 너도 누군가에게 갚으면 돼.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야."
민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감사합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두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제3부: 불씨를 지키며
7장. 새로운 일상

민준은 분식집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재료를 손질하고, 장사 준비를 했다. 손님이 오면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밤 열 시가 넘어야 일이 끝났다.
하지만 민준은 불평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따뜻한 밥이 있었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민준아, 밥 먹었어?"
"민준아, 감기 걸리면 안 돼. 따뜻하게 입어."
"민준아, 오늘 장사 잘했어. 수고했어."
정순자의 작은 말 한마디가 민준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민준은 라면도 끓일 수 있게 되었다. 두 달이 지나자, 김밥도 말 수 있게 되었다. 정순자는 차근차근 요리를 가르쳐주었다.
"손끝에 정성을 담으면, 그게 맛이 돼." 정순자가 말했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는 거야."
민준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어느 날, 정순자가 서류 봉투를 건넸다.
"이거, 내가 알아봤는데."
봉투 안에는 검정고시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너, 학교 못 다녔다고 했잖아. 이거 따면 고졸 학력이 생겨. 나중에 뭘 하든 도움이 될 거야."
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정순자가 덧붙였다. "신분증 문제도 알아보고 있어. 복지관에서 도와준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될 거야."
민준은 그날 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가슴이 벅차서. 누군가 자신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낯설고 감사했다.
8장. 시련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3월의 어느 날, 정순자가 쓰러졌다.
"어머니!"
어느새 민준은 정순자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 그렇게 불렀을 때, 정순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었다.
"민준아...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구급차에 실려 간 정순자에게 내려진 진단은 췌장암이었다.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민준이 울먹이며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건 알았지." 정순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검사받기 무서웠어. 혼자니까. 알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이제 혼자 아니잖아요. 저 있잖아요."
정순자가 민준의 손을 잡았다.
"그래. 네가 있지. 그래서 이제야 말할 수 있었어."
민준은 울었다. 또 혼자가 되는 건가. 겨우 찾은 가족을, 또 잃는 건가.
"민준아." 정순자가 말했다. "울지 마. 아직 죽은 거 아니야."
"..."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 시간이 많지 않대. 6개월, 길면 1년."
"그럼 더 치료받으세요. 저 돈 벌게요. 어떻게든..."
정순자가 고개를 저었다.
"민준아, 사람은 다 죽어. 언젠가는. 그게 조금 빠르냐 늦으냐의 차이야."
"..."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았어. 힘들 때도 많았지만, 좋은 사람도 만났고, 뜻깊은 일도 했고. 그리고 마지막에 너를 만났어." 정순자가 웃었다. "아들 같은 아이를."
민준은 말을 잃었다.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요."
"가게, 네가 이어받아줘."
민준은 놀라서 정순자를 바라보았다.
"이 가게는 내 평생이야. 남편과 함께 꿈꾸던 거였어. 작지만,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어주는 곳. 그게 우리의 꿈이었어."
"..."
"네가 이어줬으면 해. 이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면 해."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대답하고 있었다.
9장. 마지막 성탄절

정순자는 그해 겨울을 버텼다.
다시 12월 24일, 성탄 전야가 되었다. 정확히 1년 전, 민준이 죽을 뻔했던 그 밤이었다.
정순자는 이제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민준은 낮에는 가게를 운영하고, 저녁에는 병원을 찾았다.
"어머니, 왔어요."
"어... 민준이구나."
정순자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오늘... 무슨 날이지?"
"성탄 전야예요."
"아... 벌써 1년이 됐구나."
"네. 1년 됐어요."
민준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난로 하나였다.
"이게 뭐야?"
"1년 전에 못 판 손난로예요. 하나 남겨뒀어요."
민준이 손난로를 까서 정순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1년 전 이 손난로를 들고 있을 때, 저는 죽고 싶었어요." 민준이 말했다. "아니, 죽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살고 싶지 않았어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었어요."
"..."
"그때 어머니가 손을 잡아줬잖아요. 그 손이 따뜻했어요. 손난로보다 더."
정순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 덕분에 저는 지금 살아있어요. 살고 싶어졌어요. 뭔가 하고 싶어졌어요. 어머니가 저한테 그걸 줬어요."
"민준아..."
"가게, 잘 할게요. 어머니처럼, 따뜻한 밥 한 끼 내어주는 곳. 누군가에게 또 손을 내밀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만들게요."
정순자가 미소 지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그 미소는 평화로웠다.
"고마워, 민준아. 네가 내 아들이어서 정말 좋았어."
민준은 정순자의 손을 꼭 잡았다. 마른 손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1년 전과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그날 밤, 자정이 되기 조금 전, 정순자는 민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꺼지지 않는 불빛

5년 후.
명동의 작은 분식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간판은 바뀌었다. '순자네 분식'에서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민준은 이제 스물한 살이 되었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땄고, 방송통신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가게 운영과 공부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게는 작았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이곳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어서오세요."
민준이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지나가는 노숙인에게 무료로 라면을 내주기도 했다. 보육원 아이들이 오면 후식으로 호떡을 튀겨주기도 했다.
"사장님, 왜 이렇게 잘해줘요?"
어느 날 한 아이가 물었다.
민준은 미소 지었다. "나도 받은 게 있거든. 그걸 갚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민준이 덧붙였다.
"너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갚으면 돼.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야."
12월 24일, 또다시 성탄 전야가 찾아왔다.
민준은 가게 문을 닫고, 명동 대성당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는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따뜻한 코코아가 담겨 있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손난로를 파는 아이들이 있었다. 노숙인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들에게 민준은 코코아를 나눠주었다.
"추우시죠? 이거 드세요. 따뜻해요."
"고... 고마워요."
민준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6년 전,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정순자처럼.
"괜찮아요. 힘내요."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자정이었다.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송이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 잘하고 있죠?"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정순자가 웃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가장 작은 불빛도 의미가 있다.
그 불빛이 또 다른 불빛을 켜고, 그 불빛이 또 다른 불빛을 켜면,
언젠가는 온 세상이 환해질 테니까.
민준은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나눠줄 코코아가 남아 있었다.
성탄절의 밤, 꺼지지 않는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 끝 —
작가의 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처음 읽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참 슬펐습니다. 왜 아무도 그 아이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그 아이는 성냥불 속 환상에서만 행복을 찾아야 했을까.
이 이야기는 그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면? 만약 작은 온기라도 전해졌다면? 그 아이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 주변에도 민준이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외로움과 싸우는 사람들. 때로 우리는 그들을 외면합니다. 눈앞의 행복에 취해서.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내미는 손 하나, 함께 나누는 밥 한 끼. 그 작은 것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정순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받은 것을 갚는 삶.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주는 삶.
이 성탄절, 당신 주변의 '민준이'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시길.
어둠 속에서 가장 작은 불빛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2024년 12월, 내필션에서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 내필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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