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6:45ㆍ소설
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좁은 방 안에 세 사람이 앉았다.
재혁, 순희, 그리고 창수.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무거웠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기울고 있었다.
창수가 먼저 말했다.
"순희야... 미안하다."
순희가 고개를 들었다.
"삼십 년 전, 내가 너한테 한 짓... 평생 후회했어."
"..."
"네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도망쳤어. 겁이 났어. 집에 아내랑 아이가 있는데, 또 다른 아이가 생겼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창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도망쳤어. 비겁하게."
순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중에... 민준이가 죽었다는 걸 알았어요?"
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몇 년 뒤에. 그때... 죽고 싶었어."
"..."
"내 잘못이었어. 내가 책임을 졌으면 그 아이가 살았을지도 몰라. 그 생각에 미칠 것 같았어."
창수가 기침을 했다. 거친 기침.
"그래도 찾아가진 못했어. 면목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순희가 눈물을 훔쳤다.
"삼십 년... 삼십 년 동안 아무 말도 없었어요."
"알아. 변명 안 해. 나쁜 놈이야. 용서받을 자격 없어."
재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버지가 저런 사람이었구나. 가족만 버린 게 아니라, 또 다른 여자도 버렸구나. 아이까지.
분노가 올라왔다. 그런데 동시에, 어떤 슬픔도 느껴졌다.
저 야윈 노인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구나. 죽고 싶었다고. 미칠 것 같았다고.
그게 벌이었을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순희가 입을 열었다.
"저... 삼십 년 동안 당신을 증오했어요."
창수가 고개를 들었다.
"죽이고 싶었어요. 지옥에 가라고 저주했어요. 매일 밤 울면서 당신을 원망했어요."
"..."
"그런데요."
순희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 증오가... 저를 감옥에 가뒀어요."
창수가 눈을 깜빡였다.
"삼십 년 동안 당신을 미워하면서, 저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갔어요. 과거에 갇혀서, 분노에 갇혀서, 제자리에서 맴돌았어요."
순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용서가 뭔지 몰랐어요. 용서하면 당신이 용납되는 줄 알았어요. 당신이 한 짓이 괜찮아지는 줄 알았어요."
"..."
"근데 아니더라고요."
순희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수를 보았다.
"용서는 당신을 위한 게 아니에요. 저를 위한 거예요."
창수가 눈물을 흘렸다.
"저를 자유롭게 하려고 용서하는 거예요. 이 분노의 감옥에서 나오려고.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순희가 두 손을 모았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어요."
창수가 놀란 얼굴로 순희를 보았다.
"용서...한다고?"
"완전히 용서됐다고는 못 하겠어요. 아직 아파요. 아마 평생 아플 거예요."
순희가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놓기로 했어요. 이 분노를. 이 증오를. 더 이상 붙잡고 있지 않기로요."
창수가 무릎을 꿇었다.
"순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세요."
창수가 일어나지 못했다. 어깨가 떨렸다. 흐느꼈다.
재혁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삼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
한참 뒤, 창수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아..."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한테도... 미안하다."
"..."
"너랑 엄마를 버리고 떠났어. 그게 내 인생에서 제일 큰 잘못이야."
창수가 기침을 했다.
"네 엄마... 장례식에도 못 갔어. 알면서도. 면목이 없어서."
재혁의 손이 떨렸다.
"그때 네가 혼자 장례 치렀다는 거 나중에 알았어. 서른다섯 살짜리가. 혼자서."
"..."
"미칠 것 같았어. 내가 인간이 아니구나. 그 생각이 들었어."
창수가 눈물을 흘렸다.
"용서해달라고 말 못 해. 그럴 자격 없어. 그냥... 미안하다. 그 말밖에 못 하겠어."
재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용서하지 마.'
'그 인간은 자격 없어.'
'네가 왜 용서해. 네가 받은 상처는?'
그런데.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순희의 목소리.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한 거예요."
재혁은 눈을 감았다.
삼십 년.
삼십 년 동안 이 분노를 안고 살았다. 이 무게를 지고 살았다.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뭘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 때문일까.
아니.
그건 핑계다.
아버지가 준 상처는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붙잡고 놓지 않은 건 나다. 삼십 년 동안 그 분노를 키운 건 나다.
이제.
놓을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재혁이 입을 열었다.
"용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창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미워요. 아직 아파요. 삼십 년은 너무 길었어요."
"..."
"그래도..."
재혁은 숨을 들이쉬었다.
"노력해볼게요."
창수의 눈에 빛이 떠올랐다.
"놓으려고요. 이 분노를. 순희씨처럼."
재혁이 순희를 바라보았다. 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못 해요.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어쩌면 평생 걸릴지도요."
"..."
"그래도... 시작해볼게요."
창수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고맙다... 재혁아... 고맙다..."
해가 졌다.
방 안에 어둠이 내렸다. 순희가 불을 켰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순희가 일어섰다.
"저 빵집 가야 해요. 문 닫아야 하거든요."
재혁도 일어섰다.
"저도 갈게요."
창수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순희야."
순희가 돌아보았다.
"다시... 와줄 수 있어?"
순희가 미소 지었다.
"그럼요. 내일 빵 가져올게요."
"...고맙다."
"맛있는 거 구워올게요."
두 사람이 골목을 걸었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길을 비췄다.
재혁이 말했다.
"이상해요."
"뭐가요?"
"뭔가... 끝난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뭔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용서는 끝이 아니에요. 시작이에요."
"시작?"
"오늘 시작한 거예요.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야 해요. 용서하기로 선택하는 거. 매일."
재혁은 그 말을 곱씹었다.
"힘들겠네요."
"그렇죠. 근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순희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삼십 년 동안 안 하고 살아봤잖아요. 어땠어요?"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빵집 앞에 도착했다.
순희가 열쇠를 꺼냈다.
"오늘... 고마웠어요."
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고맙죠. 혼자였으면 못 갔을 거예요."
순희가 미소 지었다.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그날 밤, 두 사람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삼십 년 묵은 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아주 조금.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자라기 시작했다.
[9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10장: 마지막 손님 - 창수의 마지막 날들, 그리고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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