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6:29ㆍ소설
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재혁은 아버지를 방 안에 눕혔다.
좁은 방이었다. 낡은 장판, 해진 이불, 작은 창문. 한쪽 구석에 산소호흡기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누운 채 거친 숨을 쉬었다. 기침이 가라앉자, 눈을 감았다. 금방 잠이 든 것 같았다.
재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아버지의 삶이었다.
삼십 년 전, 가족을 버리고 떠난 남자. 그가 도착한 곳이 이 작은 방이었다.
화려할 줄 알았다.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쓸쓸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말년.
'그래도 동정하지 마.'
마음속 목소리가 말했다.
'자업자득이야.'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업자득이야.
그런데 왜.
왜 마음 한구석이 이렇게 아픈 걸까.
재혁은 집을 나왔다.
빵집으로 향했다. 순희에게 할 말이 있었다.
딸랑, 종소리.
순희가 고개를 들었다. 재혁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
"순희씨."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뛰쳐나가서."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재혁이 창가 자리에 앉았다. 순희가 커피를 가져왔다.
"아버지 만났어요?"
"네."
"어땠어요?"
재혁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순희가 맞은편에 앉았다.
"쏟아냈어요. 삼십 년 동안 쌓인 거. 왜 그랬냐고, 왜 버렸냐고."
"..."
"그랬더니 무릎 꿇더라고요. 미안하다고."
순희의 눈이 흔들렸다.
"미안하다..."
"네. 근데 그게... 이상했어요."
"이상했다고요?"
재혁이 고개를 숙였다.
"삼십 년 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잖아요. 미안하다. 근데 막상 들으니까... 아무것도 안 느껴지더라고요."
"..."
"시원해야 하는데, 안 시원해요. 뭔가 해결돼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결된 것 같아요."
재혁이 순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거예요?"
순희가 잠시 생각했다.
"아마... 용서가 아직 안 됐기 때문일 거예요."
"네?"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용서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용서는...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상대가 뭘 하든."
재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가 사과 안 해도 용서할 수 있다는 거예요?"
"네. 반대로, 상대가 사과해도 용서 안 할 수 있고요."
"..."
"용서는 상대에 대한 게 아니에요. 나에 대한 거예요. 내가 이 분노를 놓을 건지, 계속 붙잡고 있을 건지. 그 선택이 용서예요."
재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딸랑.
김영자였다. 빵집 단골 아줌마.
"순희씨! 오늘도 바쁘네~"
영자가 들어오다가 재혁을 보았다.
"어머, 이 분 누구야? 요즘 맨날 오시던 분 아니야?"
순희가 일어섰다.
"네, 단골손님이에요."
"허허, 단골이 생겼네~ 좋은 거야."
영자가 진열대 앞으로 갔다. 빵을 고르면서 수다를 떨었다.
"아, 순희씨. 어제 창수 어르신 집 앞에서 널 봤어."
순희의 얼굴이 굳었다.
"멀리서 봐서 말 못 걸었는데. 거기 왜 갔어? 병문안?"
재혁이 고개를 들었다.
"순희씨가 아버지 집에 갔다고요?"
영자가 재혁을 보았다.
"어? 아버지? 창수 어르신이 이 분 아버지야?"
순희가 당황했다.
"영자씨, 그게..."
영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럼 이 분이 창수 어르신 아들이야? 연락 안 된다던 그 아들?"
"..."
영자가 재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이고, 세상에. 그래서 요즘 이 동네 온 거야? 아버지 뵈러?"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순희를 바라보았다.
"순희씨. 어제 아버지 집에 갔어요?"
순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
"왜 말 안 했어요?"
"저는... 그냥..."
영자가 끼어들었다.
"아, 순희씨 옛날에 창수 어르신이랑 아는 사이였잖아. 그래서 병문안 간 거 아니야?"
재혁의 눈이 커졌다.
"영자씨도 알아요? 순희씨랑 창수 어르신 사이."
영자가 눈을 깜빡였다.
"어? 알지. 옛날에... 어, 잠깐. 내가 말해도 되는 건가?"
순희가 고개를 숙였다.
"됐어요. 이제... 다 알아요."
영자가 멋쩍게 웃었다.
"아이고, 내가 또 실수했네. 미안미안."
영자가 빵을 사서 나간 뒤,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재혁이 물었다.
"어제 아버지 집에 간 거예요?"
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용서를 전하러요."
재혁은 잠시 침묵했다.
"만났어요?"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문 앞에서 돌아왔어요. 또."
"..."
"손님이 어제 아버지한테 간 거 봤어요. 싸우는 소리도 들렸고요."
재혁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안 들어갔어요. 방해될 것 같아서."
순희가 쓸쓸하게 웃었다.
"저도 아직 못 가잖아요. 십 년째."
재혁은 순희를 바라보았다.
"같이 가요."
순희가 눈을 들었다.
"네?"
"혼자 못 가면, 같이 가면 되잖아요. 저도 혼자선 못 갔으니까."
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저랑... 같이요?"
"네."
재혁이 일어섰다.
"지금 가요. 미루면 또 못 가요."
두 사람은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산 밑의 주택가. 좁은 길.
순희의 심장이 뛰었다. 십 년 동안 이 길을 수십 번 걸었다. 그리고 수십 번 돌아섰다.
그런데 오늘은.
옆에 누가 있었다.
재혁이 말했다.
"긴장돼요?"
"네."
"저도요."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어색하고, 긴장되고, 그러면서도 조금 편한 웃음.
"가요."

아버지 집 앞.
재혁이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렸다.
발소리. 문이 열렸다.
야윈 노인이 나타났다. 재혁을 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눈이 멈췄다.
"순희...?"
순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순희... 네가 왜 여기..."
"할 말이 있어서요."
순희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날,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삼십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
침묵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8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9장: 용서의 의미 - 세 사람의 대화, 그리고 용서의 선택
내필션 |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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