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손님 - 제7장: 속삭임

2025. 11. 26. 16:15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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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재혁의 악몽이 심해졌다.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어두운 골목, 낡은 대문, 초인종. 손을 뻗으면 문이 열리고, 그림자가 나타난다.

"왜 왔어."

"꺼져."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땀에 젖어 깨어나면 새벽이었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뛰었다.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재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왜 이러는 거지.'

낮에는 괜찮았다. 빵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순희와 이야기하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밤이 되면 모든 게 무너졌다.


'포기해.'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늦었어. 삼십 년이야. 이제 와서 뭘 해?'

재혁은 눈을 감았다.

'그 인간은 평생 너한테 연락 안 했어. 사과도 안 했어. 그런 인간한테 왜 네가 먼저 가?'

맞는 말이었다.

'순희? 그 여자 말 믿지 마. 용서하면 자유로워진다? 웃기는 소리야. 용서하면 지는 거야.'

재혁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서울로 돌아가. 회사 일도 밀렸잖아.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맞아. 돌아가야 해.

'그 인간은 알아서 죽을 거야. 네가 안 가도 돼. 네가 왜 가.'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서울 가자. 이 바보짓 그만하자.'


아침이 되자, 재혁은 짐을 쌌다.

호텔비를 정산하고, 차에 짐을 실었다.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았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

마음속 목소리가 말했다.

'빨리 가. 뭘 망설여?'

재혁은 핸들을 쥔 채 앉아 있었다.

빵집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희.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한 거예요."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요."


재혁은 시동을 껐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빵집으로 걸어갔다.


"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순희가 반갑게 맞았다.

재혁은 창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카운터 앞에 섰다.

"순희씨."

"네?"

"저... 오늘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순희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요?"

"네. 짐도 다 쌌어요. 차에 시동도 걸었고요."

"..."

"근데 출발을 못 했어요."

순희가 조용히 물었다.

"왜요?"

재혁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

"밤마다 악몽을 꿔요. 아버지가 나타나서 '꺼져'라고 해요. 그러면 숨이 막혀요."

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낮에 여기 오면 괜찮아요. 순희씨랑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래서... 그래서 아직 못 가겠어요."

재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보 같죠? 마흔두 살 먹은 어른이 이러는 거."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지 않아요."

"또 그 말이에요."

"사실이니까요."

순희가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앉으세요. 커피 드릴게요."


커피를 마시며, 재혁은 생각했다.

왜 이 여자 앞에서는 마음이 열릴까.

처음 만난 지 삼 주밖에 안 됐다. 그런데 오래 알던 사람처럼 편하다. 아무에게도 못 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상했다.

그리고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순희씨."

"네?"

"저번에 그 남자 이름 안 알려줬잖아요. 순희씨를 버린 그 남자."

순희의 손이 멈췄다.

"네."

"제 아버지 이름이 이창수예요."

순희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눈이 흔들렸다.

"이 동네에 이창수라는 노인이 살거든요. 혹시..."

재혁은 말을 멈췄다. 순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같은 사람이에요?"


긴 침묵.

순희의 입술이 떨렸다.

"..."

"순희씨?"

"...어떻게 알았어요?"

재혁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뭐라고요?"

"이창수요. 그 사람... 저를 버린 남자예요."

재혁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순희씨를 버린 사람이... 제 아버지라고요?"

순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재혁은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지러웠다.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럼... 순희씨가 잃은 아이는..."

"손님의..."

순희가 목이 메었다.

"이복동생... 될 뻔했던 아이예요."


재혁은 빵집을 뛰쳐나갔다.

순희가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을 뛰었다. 아무 데나 뛰었다. 숨이 찼다. 다리가 풀렸다. 어느 벤치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게.'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순희가 아버지의 여자였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그 여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있었다. 태어났다가 죽은 아이. 자신의 이복동생이 될 뻔했던 아이.

'그래서 순희씨가 이 동네에 온 거야.'

'그래서 나한테 친절했던 거야?'

'아니, 그녀가 날 알았던 건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재혁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봤지?'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도 결국 그 인간 때문에 망가진 거야. 이창수, 그 쓰레기 때문에.'

재혁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그 인간 때문이야. 너도, 순희도, 그리고 죽은 아이도. 다 그 인간 잘못이야.'

맞아.

'용서? 웃기는 소리야. 그런 인간을 왜 용서해? 지옥에 가야 해.'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따져. 왜 그랬냐고. 왜 우리를 버렸냐고. 왜 그렇게 살았냐고.'

그래. 가야겠다.

재혁은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집 앞.

재혁은 대문 앞에 섰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분노가 두려움을 밀어냈다.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기다렸다.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무거운 발소리. 문이 열렸다.

야윈 노인이 서 있었다.

흰 머리, 깊은 주름, 움푹 꺼진 눈. 뼈만 남은 몸.

이창수.

삼십 년 만에 보는 아버지.


노인이 재혁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눈이 커졌다.

"...재혁아?"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재혁아... 네가 왜 여기..."

"왜 그랬어요."

재혁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뭐라고...?"

"왜 우리를 버렸냐고요."

노인이 멈칫했다.

"삼십 년이에요. 삼십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잖아요. 사과 한 마디 없었잖아요. 엄마 장례식에도 안 왔잖아요."

"..."

"그리고 순희씨요. 그 여자도 알아요? 당신 때문에 아이를 잃은 여자. 그 사람도 여기 살아요. 알고 있었어요?"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희가... 여기 있어?"

"대답해요. 왜 그렇게 살았어요. 왜 그렇게 사람들 망치고 다녔어요."

재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아요? 공장, 식당, 신문 배달. 손이 트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어요. 혼자서 나 키우느라고. 당신 때문에!"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

"근데 사과 한 마디 없이 죽으려고요? 그게 사람이에요?"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재혁은 움찔했다.

"미안하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미안하다."

"..."

"변명 안 할게. 나는... 나쁜 놈이었어. 겁쟁이였고, 무책임했고, 비겁했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네 엄마한테도, 너한테도, 순희한테도... 평생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서해달라고 말 못 해. 그럴 자격 없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노인이 기침을 했다. 격렬한 기침. 바닥에 쓰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재혁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이 쓰러지는 걸 보면서도.

'내버려둬.'

마음속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게 죽으면 돼.'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숨이 거칠었다.

재혁은 서 있었다.

'가.'

'돌아서.'

'네가 왜 도와.'

그런데.

몸이 움직였다.

재혁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노인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노인이 재혁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재혁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바닥이 차가워요."

재혁은 노인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어깨 위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삼십 년 동안 단단했던 것이 금이 갔다.

분노는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그 틈새로 다른 것이 새어 들어왔다.

연민? 슬픔?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


[7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8장: 영자의 실수 - 재혁과 순희가 함께 창수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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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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