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6:01ㆍ소설
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며칠이 더 지났다.
재혁은 매일 아버지 집 앞에 갔다. 그리고 매일 돌아왔다.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 채.
그러나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대문에서 십 미터 떨어진 곳에 섰다. 다음 날은 오 미터. 그다음 날은 대문 바로 앞. 그리고 오늘은, 초인종에 손을 댔다가 뗐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벽이 얇아지고 있었다.
빵집은 여전히 재혁의 안식처였다.
오후가 되면 찾아가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고, 순희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어땠어요?"
순희가 물었다.
"손을 댔어요. 초인종에."
"와, 대단하네요."
"뗐지만요."
"그래도 댄 거잖아요. 어제보다 나아진 거예요."
재혁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웃을 수 있었다.
"이상한 위로네요."
"효과 있잖아요."
순희도 웃었다.
어느 날 오후.
빵집에 손님이 없었다. 재혁과 순희, 둘만 있었다.
재혁은 오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요.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잖아요."
순희의 손이 잠시 멈췄다.
"네."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뒤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안 하셔도..."
"아뇨."
순희가 말을 끊었다.
"말할게요. 손님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녀가 재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도 버림받은 적 있어요."
순희가 말했다.
"삼십 년 전이에요. 스물여덟 살 때."
재혁은 조용히 들었다.
"한 남자를 만났어요. 중후하고, 말 잘하고, 다정한 사람. 미혼이라고 했어요. 결혼하자고 했어요."
순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믿었죠.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임신했어요."
"..."
"임신 사실을 말하니까, 그 사람이 사라졌어요. 나중에 알았죠. 그 사람한테 가족이 있다는 걸. 아내와 아이가."
재혁의 눈이 흔들렸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같았다. 아니, 자신의 이야기와 겹치는 것 같았다.
"혼자 아이를 낳았어요. 아들이었어요."
순희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런데... 백일을 못 넘겼어요. 아파서... 병원비가 없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보냈어요."
재혁은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 후로 삼십 년, 그 남자를 증오하며 살았어요."
순희가 눈물을 훔쳤다.
"죽이고 싶었어요. 아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인간만 아니었으면 내 아이가 살았을 텐데. 그 인간이 책임을 졌으면 이렇게 안 됐을 텐데."
"..."
"근데 어느 날, 깨달았어요."
순희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그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둔다는 걸요."
재혁은 숨을 멈춘 채 들었다.
"삼십 년 동안 그 사람을 미워했는데, 그 미움이 그 사람한테 뭘 했겠어요? 아무것도요. 그 사람은 자기 인생 살았어요. 가족이랑 잘 살았겠죠."
"..."
"근데 저는요. 삼십 년 동안 그 미움에 갇혀 살았어요. 밤마다 이를 갈고, 낮에도 분노하고. 그 감정이 저를 좀먹었어요."
순희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봤어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때 펑 터진 거예요."
"..."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위한 거였어요. 내가 자유로워지려고 용서하는 거예요."
순희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했어요. 완전히 용서했다고는 못 하겠어요. 아직도 가끔 아프거든요. 그래도 용서하려고 노력해요. 매일 기도해요."
재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 동네에 오신 거예요?"
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여기 살거든요."
재혁의 눈이 커졌다.
"여기요?"
"네. 그 사람한테 직접 용서를 전하려고 왔어요. 얼굴을 보고 말해야 진짜 끝날 것 같았거든요."
"만났어요?"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못 갔어요. 십 년째."
"..."
"손님이랑 똑같아요. 저도... 그 집 앞에 서면 발이 안 떨어져요."
순희가 쓸쓸하게 웃었다.
"바보 같죠?"
재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제가 한 말인데요."
"알아요. 그래서요."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쓸쓸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웃음이었다.

한참 뒤, 재혁이 물었다.
"그 남자 이름이 뭐예요?"
순희가 잠시 망설였다.
"왜요?"
"그냥요. 알고 싶어서."
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 안 해도 돼요."
"..."
재혁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 무언가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설마.'
재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설마.'
그날 밤, 재혁은 오래 생각했다.
순희의 이야기. 버림받은 여자. 아이를 잃은 엄마. 삼십 년 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가족을 버리고 떠난 남자. 삼십 년 전.
연도가 같았다.
'우연이겠지.'
재혁은 생각했다.
'그냥 우연이야.'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날 밤, 빵집 안에 희미한 온기가 감돌았다.
순희는 오래간만에 울었다. 삼십 년 묵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 이야기를 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침묵.
"저 사람도 힘들어 보였어요. 저처럼요.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순희는 느꼈다.
무언가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6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7장: 속삭임 - 진실이 밝혀지고, 재혁이 아버지와 30년 만에 대면하다
내필션 | 삶에도 옵션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지막 손님 - 제8장: 영자의 실수 (0) | 2025.11.26 |
|---|---|
| 마지막 손님 - 제7장: 속삭임 (0) | 2025.11.26 |
| 마지막 손님 - 제5장: 문 앞에 서다 (0) | 2025.11.26 |
| 마지막 손님 - 제4장: 같은 자리 (0) | 2025.11.26 |
| 마지막 손님 - 제3장: 고마운 하루 (1) | 2025.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