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손님 - 제5장: 문 앞에 서다

2025. 11. 26. 15:5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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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그날 밤, 재혁은 꿈을 꾸었다.

어두운 골목. 혼자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걸었다.

그러다 문 앞에 섰다. 낡은 나무 문.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초인종이 보였다.

손을 뻗었다.

버튼에 손가락이 닿기 직전, 문이 열렸다.

안에 누가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만 보였다. 그 그림자가 말했다.

"왜 왔어."

재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왜 왔냐고."

목소리가 커졌다.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나한테 왜 왔어. 난 네 아버지 아니야."

재혁은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그림자가 다가왔다.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재혁의 목을 잡았다.

"꺼져."

숨이 막혔다.


재혁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이 밝았다. 아침이었다.

재혁은 침대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 하는 짓인지.'

삼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꿈을 꾸다니.

그 사람이 무섭다. 아직도.

아니, 정확히는.

거부당하는 게 무섭다.


재혁은 샤워를 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가보자.

그렇게 결심했다.

이 주 동안 빙빙 돌기만 했다. 이제 결판을 내야 한다. 가서 얼굴을 보자. 무슨 말이든 해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없다.


산 밑의 주택가.

좁은 골목을 걸어 올라갔다. 익숙한 길이었다. 세 번이나 걸었던 길.

집이 보였다. 낡은 담장, 벗겨진 페인트, 녹슨 대문.

재혁은 대문 앞에 섰다.

심장이 뛰었다. 손이 떨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초인종을 눌러.'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그냥 눌러. 간단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돼.'

손을 들었다.

초인종 버튼 앞에서 멈췄다.


'왜 네가 먼저 가야 하는데?'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삼십 년 동안 함께한 목소리.

'생각해봐. 그 인간이 뭘 했어?'

재혁은 손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네 어머니를 울렸어. 너를 버렸어. 삼십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어. 사과 한 마디 없었어.'

그래. 맞아.

'근데 왜 네가 먼저 가? 그 인간이 찾아와야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지.'

재혁의 손이 내려갔다.

'그 인간은 변하지 않았어. 병들어 죽어가니까 겁이 난 거야. 진짜 반성한 게 아니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가봤자 상처만 받아. 또 버림받는 기분만 느낄 거야. 그냥 돌아가.'

재혁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그게 맞아. 돌아가.'


그때.

집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였다. 약하고, 거칠고, 아픈 기침.

재혁은 멈췄다.

다시 들렸다. 콜록콜록. 끊이지 않는 기침.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침.

재혁은 대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아버지가 있다.

죽어가고 있다.


기침 소리가 멈췄다.

재혁은 서 있었다. 손을 다시 들었다. 초인종 앞에.

그런데.

누를 수가 없었다.

손이 굳었다. 마음이 굳었다. 뭔가가 막고 있었다. 삼십 년의 분노와 원망과 상처가 벽이 되어 서 있었다.

'못 해.'

재혁은 생각했다.

'아직... 못 해.'

그는 손을 내렸다. 돌아섰다.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뒤에서 다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멀어져가는 기침 소리.

재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빵집으로 갔다.

딸랑, 종소리.

순희가 고개를 들었다. 재혁의 얼굴을 보더니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 있어요?"

재혁은 대답하지 않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순희가 커피를 가져왔다. 테이블에 내려놓고, 잠시 재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표정이 안 좋네요."

"..."

"힘든 일 있으면, 말해도 돼요. 들어줄 수 있어요."

재혁이 고개를 들었다. 순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따뜻했다. 캐묻는 눈이 아니었다. 그냥... 기다리는 눈이었다.

재혁은 입을 열었다.

"저... 이 동네에 아버지가 살아요."

순희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삼십 년 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요."

"..."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대요. 그래서... 왔어요. 그런데..."

재혁은 말을 멈췄다. 목이 막혔다.

"가지를 못해요."

순희가 조용히 물었다.

"왜요?"

"모르겠어요."

재혁이 고개를 숙였다.

"미운데... 미운데, 왜 여기 온 건지 모르겠어요. 보고 싶지 않은데... 왜 발걸음이 이쪽으로 향하는지. 용서하기 싫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혁이 계속했다.

"오늘 갔어요. 그 집 앞에. 초인종 앞에 서서, 손을 들었어요. 근데... 못 눌렀어요."

"..."

"손이 안 움직였어요. 뭔가가... 막는 것 같았어요."

재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보 같죠?"

순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네?"

"바보 같지 않아요. 당연한 거예요."

순희가 재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삼십 년이잖아요. 삼십 년 동안 쌓인 상처가 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지겠어요?"

재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오늘 못 눌렀으면, 내일 다시 가면 되는 거예요. 내일도 못 누르면, 모레 다시 가면 되고."

"그러다 그 사람이 죽으면요?"

순희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돼요."

재혁은 순희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이 위로가 되나요?"

순희가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요."

"네?"

"나중에 이야기해줄게요. 오늘은... 그냥 빵이나 드세요."

순희가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단팥빵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서비스예요."

재혁은 빵을 받아들었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맛있게 드세요."


그날 밤, 재혁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별이 빛났다.

순희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오늘 못 누르면, 내일 다시 가면 돼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요."

비슷한 경험.

그녀에게도 용서하지 못한 누군가가 있는 걸까.

재혁은 눈을 감았다.

내일.

내일 다시 가보자.


그날 밤, 집 안에서 기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야윈 노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산소호흡기가 곁에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인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문득 생각했다. 오늘, 대문 밖에 누가 있었던 것 같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다 사라졌다.

누구였을까.

아마 착각이겠지.

노인은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 전, 오래전 버린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두 살의 작고 마른 소년.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살아 있기나 한 걸까.


[5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6장: 순희의 고백 - 순희가 재혁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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