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5:42ㆍ소설
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일주일이 지났다.
재혁은 매일 빵집에 왔다.
오후 세 시. 창가 자리. 아메리카노 한 잔. 그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처음엔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갈 곳이 없어서. 호텔 방에 있으면 답답해서. 아버지 집 앞에는 갈 수 없어서.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재혁은 깨달았다.
이 빵집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왜인지 모르겠다. 특별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빵집. 평범한 커피. 평범한 인테리어.
그런데 공기가 달랐다. 빵 냄새와 따뜻함과...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 오래된 긴장이 풀리는 느낌.
그리고 그 여자.
순희라는 이름의 빵집 주인. 그녀는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재혁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냥 내버려뒀다. 그게 편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따뜻하고, 담담한 미소.
재혁은 그런 미소를 오랫동안 본 적이 없었다.
"저기요."
어느 날, 재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순희가 다가왔다. "네?"
"여기... 빵집 이름이 '고마운 하루'잖아요. 왜 그렇게 지었어요?"
순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요."
"감사요?"
"네. 오늘도 살아 있구나, 오늘도 빵을 구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요."
재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하다? 그는 평생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 목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 회의, 결재, 전화, 약속. 감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상한 이름이네요."
순희가 웃었다. "그래요?"
"보통은 '행복한 빵집'이나 '달콤한 하루' 같은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저는 '고마운'이 좋더라고요."
"왜요?"
순희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이었다.
"행복이나 달콤은... 뭔가 얻어야 느끼는 거잖아요.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달콤하고."
"네."
"그런데 고마움은 달라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느껴지는 거거든요. 아무것도 없어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어도 고마워할 수 있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 날도 재혁은 왔다.
이번엔 빵을 시켰다. 단팥빵 하나.
"여기 단팥빵이 잘 나왔다고 했잖아요. 진짠지 확인해보려고요."
순희가 미소 지으며 빵을 건넸다.
재혁은 한입 베어 물었다.
달았다. 그리고 따뜻했다. 팥 맛이 진했다. 어릴 때 먹던 맛 같았다. 어머니가 간식으로 사오던...
"어때요?"
"...괜찮네요."
재혁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빵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재혁과 순희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날씨 이야기, 빵 이야기, 동네 이야기. 별것 아닌 말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말들이 쌓이면서, 어색함이 줄었다.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순희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이 동네 오래 사셨어요?"
어느 날 재혁이 물었다.
"십 년 됐어요."
"원래 어디 사셨는데요?"
"여기저기요. 떠돌이처럼 살았어요."
"왜 이 동네로 오셨어요?"
순희가 잠시 멈췄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찾는 사람요?"
"네."
"찾았어요?"
순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대답 대신 질문했다.
"손님은요? 이 동네 처음이라고 하셨잖아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재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냥요."
"그냥?"
"네. 그냥."
순희는 더 묻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섰다.
재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그게 무슨 대답인가. 그런데 진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어서요. 그런데 찾아갈 용기가 없어서요.'
그 말을 어떻게 해.
그날 밤, 재혁은 호텔 방에서 술을 마셨다.
혼자. 작은 소주병 하나를 따서, 천천히.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별이 많았다.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별들.
재혁은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왜 여기 있는 걸까.
아버지 집은 여기서 걸어서 십 분 거리다. 십 분이면 갈 수 있다. 그런데 왜 가지 못하는 걸까.
'그 인간이 뭘 했는데.'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머니를 버렸잖아. 너를 버렸잖아. 평생 사과 한 마디 없었잖아.'
재혁은 술을 마셨다.
'용서하면 지는 거야. 먼저 손 내밀면, 네가 바보 되는 거야.'
그래. 맞는 말이다.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돌아가. 서울로. 그 인간은 알아서 죽겠지. 네가 왜 가.'
재혁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빵집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던 것.
"아무것도 없어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말이었다. 그런데 왠지.
왠지 마음에 남았다.
일주일 뒤.
재혁은 여전히 그 빵집에 있었다.
서울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비서 민수였다.
"사장님, 언제 올라오십니까?"
"...조금 더 있다 가려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벌써 이 주째인데요."
"일 없어. 좀 쉬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급한 건 제가 처리해둘게요."
전화를 끊었다. 재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주. 벌써 이 주가 지났다.
아버지 집 앞에는 세 번 갔다. 세 번 다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매번 손이 굳었다. 매번 발이 돌아섰다.
'뭐 하는 짓인지.'
재혁은 자신이 한심했다. 마흔두 살 먹은 성인이, 사업체 대표가, 문 하나를 열지 못하고 있다니.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순희가 들어왔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네."
순희가 앞치마를 두르며 카운터로 들어갔다.
"오늘 크림빵이 잘 나왔어요. 드셔볼래요?"
"...네."
재혁은 대답했다. 순희가 빵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재혁이 말했다.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오니까 이상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했더라. 기억이 안 났다.
순희가 미소 지었다.
"맛있게 드세요."
재혁은 빵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친절할까.
손님이니까? 장사니까?
아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장사치의 친절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뭔가... 진심인 것 같았다.
'저 사람도 힘든 일이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따뜻한 사람도 힘든 일이 있었을까. 울었던 밤이 있었을까. 누군가를 미워했던 적이 있었을까.
재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알고 싶었다.

그날 오후, 빵집 안에 이상한 균형이 있었다.
창가에 앉은 남자의 어깨 위에는 오래된 그림자가 있었다. 무겁고 어두운 것.
카운터 뒤 여자의 곁에는 희미한 온기가 있었다. 가볍고 따뜻한 것.
두 사람은 서로를 몰랐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들을 이 작은 공간에 모았다.
우연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4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5장: 문 앞에 서다 - 아버지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는 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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