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6. 15:10ㆍ소설
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이재혁.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 직원 오십 명, 연 매출 이백억.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성공한 인생이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안쪽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재혁은 이 동네에 온 지 사흘째였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 산 아래 펼쳐진 조용한 마을.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버림받은 곳.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재혁은 열두 살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키가 작고 마른 아이였다. 말이 없고, 공부를 잘했고,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가 사라졌다.
처음엔 출장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자주 출장을 갔으니까.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전화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울었다. 방문 너머로 들리는 흐느낌.
재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떠났다는 것을 안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동네 어른들의 수군거림. "창수가 바람이 났대." "젊은 여자 꼬셔서 도망갔대." "불쌍한 건 마누라하고 아들이지."
재혁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야, 너희 아빠 도망갔다며?" "아빠가 엄마 버렸대!"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울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같은 건 필요 없어.'
열두 살의 재혁은 그렇게 결심했다.
어머니는 혼자서 재혁을 키웠다.
공장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새벽엔 신문 배달을 했다. 손이 트고, 허리가 굽었다. 그래도 재혁의 학비를 댔고, 밥을 차렸고, 빨래를 했다.
재혁은 공부에 매달렸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어머니가 웃었으니까. 그 웃음이 좋았다.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수석 졸업. 대학 장학금. 대기업 입사. 그리고 서른에 창업.
재혁은 성공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재혁이 서른다섯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위암이었다. 발견했을 땐 이미 늦었다. 병원비를 아끼느라 검진을 미루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재혁의 손을 잡았다.
"재혁아..."
"네, 엄마."
"아버지... 미워하지 마라."
재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손이 축 늘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재혁은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돌덩이처럼 굳어갔다.
미워하지 말라고?
그 인간을?
평생 우리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도망가고, 엄마를 그렇게 고생시킨 그 인간을?
재혁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아버지 이창수가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건 두 달 전이었다.
우연이었다. 사업차 들른 지방 도시에서,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말했다. "이 동네 출신이시라고요? 그럼 이창수라는 분 아세요? 폐암 말기라던데..."
재혁은 술잔을 든 채 굳었다.
이창수.
삼십 년 전에 사라진 그 이름.
"...아뇨. 모릅니다."
재혁은 거짓말을 했다. 그날 밤, 호텔 방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 이 근처에. 그리고 죽어가고 있다.
가슴 한쪽이 뒤틀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 삼십 년 동안 묻어두었던 것들이 올라왔다.
'상관없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재혁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발걸음은 이 동네를 향했다.
사흘 전, 재혁은 아버지의 집을 찾아냈다.
인터넷 검색과 동사무소 문의 몇 번으로 알아낸 주소. 산기슭의 낡은 주택. 대문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재혁은 그 집 앞에 섰다.
한참을 서 있었다.
초인종에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였다. 다시 뻗었다가, 또 거둬들였다.
'뭐라고 할 건데?'
'삼십 년 만에 보는 아들입니다?'
'왜 우리를 버렸어요?'
'왜 엄마 장례식에도 안 왔어요?'
말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니, 말보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분노와 원망과 슬픔과... 그리고 어쩌면 그리움까지. 모든 게 뒤엉켜서 목을 막았다.
결국 재혁은 돌아섰다.
그리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어느 빵집 앞에서 멈춰 섰다.
고마운 하루.
그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간 건, 아마 빵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빵집에서 나온 뒤, 재혁은 숙소로 돌아왔다.
역 근처의 작은 비즈니스 호텔. 사장이 직접 묵기엔 초라한 곳이었지만, 어차피 이 동네엔 좋은 숙소가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재혁은 침대에 쓰러졌다.
피곤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빵집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쉰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조용하고 단정한 인상. 그녀가 건넨 커피는 손대지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또 오세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처음 보는 손님에게.
재혁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대신 옛날 일이 떠올랐다. 열두 살 겨울. 아버지가 떠난 날.
그날 밤, 재혁은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발소리. 아버지의 발소리였다. 재혁은 이불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어디 가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떨리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아버지의 목소리. 낮고, 어딘가 피곤한.
"이 시간에? 짐은 왜 챙겨요?"
침묵.
"당신... 설마..."
"미안해."
그 두 마디.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발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닫히는 소리.
어머니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
재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막아도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울음.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골목으로 뛰어나가는 발소리. "여보! 여보!"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밤.
길고 긴 밤.
재혁은 이불 속에서 눈을 꼭 감았다.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울지 마. 울면 지는 거야.'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다짐은 유효했다.
재혁은 울지 않았다.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사업이 어려울 때도, 혼자 술을 마시는 밤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동네에 오니까, 그 단단하던 것들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
삼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그 사람이. 사과 한마디 없이 버리고 간 그 사람이. 이제 죽는다.
'잘됐네.'
재혁은 생각했다.
'지옥에나 가라.'
그런데 왜.
왜 발걸음이 이 동네를 향했을까. 왜 그 집 앞에 서 있었을까.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걸까.
재혁은 답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 날.
재혁은 또 그 빵집에 갔다.
왜 가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버지 집에는 갈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갈 곳이 없었다.
빵집은 거기 있었다.
딸랑, 종소리.
"어서 오세요."
어제와 같은 목소리. 재혁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커피요. 아메리카노."
"네."
여주인이 커피를 내렸다. 재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은 오후. 어제와 같은 햇살. 어제와 같은 자리.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조금 덜 무거웠다.
그날 밤, 남자는 악몽을 꾸었다.
어두운 방.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아버지의 뒷모습. 어머니의 울음.
깨어났을 때, 베개가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 줄 몰랐다.
그의 어깨 위에 오래된 그림자가 있었다.
삼십 년을 함께한, 익숙한 무게. 그 그림자가 속삭였다.
'잊지 마. 그 인간이 뭘 했는지.'
[2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3장: 고마운 하루 - 순희의 새벽 기도, 그리고 그녀가 이 동네에 온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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