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손님 - 제1장: 낯선 손님

2025. 11. 26. 15:00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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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
글: 내필션(My Necessary Options)


 


본문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 골목길, '고마운 하루'라는 소박한 간판이 붙은 작은 빵집에서 따뜻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갓 구운 빵 냄새. 버터와 밀가루, 그리고 정성이 섞인 냄새.

박순희는 카운터 뒤에 서서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쉰여덟, 흰머리가 섞인 단정한 단발머리에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손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식빵을 가지런히 세우고, 모닝빵 위치를 바꾸고, 크림빵 앞에 놓인 집게를 정돈했다.

오후 세 시.

이 시간의 빵집은 한산했다. 아침에 몰렸던 출근길 손님도, 점심 무렵의 주부들도 다 빠져나간 뒤였다. 저녁 즈음에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들를 때까지, 이 적막한 시간은 순희의 몫이었다.

그녀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혼자 가게를 지키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가끔은 의자에 앉아 성경책을 펼치기도 했다. 오늘도 카운터 한쪽에 낡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책갈피가 꽂힌 곳은 마태복음이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순희는 그 구절을 수천 번은 읽었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뻐근했다. 용서. 그 두 글자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순희가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자였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어딘가 움츠러든 인상이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어서 오세요."

순희가 인사했다. 남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빵 진열대 앞을 서성이지도 않았다. 그냥 창가 자리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순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동네에서 10년을 살았지만, 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눈빛이. 저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을까.

순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나이가 드니 사람 얼굴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겠지.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훔치고 창가 자리로 다가갔다.

"뭘 드릴까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순희와 마주쳤다. 어두운 눈이었다. 피로가 쌓인 눈. 그리고 그 밑바닥에... 분노? 아니, 슬픔인가.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이 고여 있었다.

"커피요. 아메리카노."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빵은요? 오늘 단팥빵이 잘 나왔는데."

"괜찮습니다. 커피만요."

순희는 더 권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커피를 내리면서 순희는 슬쩍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창밖을 보는 척하며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이었다. 시선이 어딘가 먼 곳에 가 있었다. 과거, 혹은 마음속 어딘가.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을 순희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 거울 속에서.

커피를 들고 다가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드세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순희는 카운터로 돌아왔다. 성경책을 집어 들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창가 쪽으로 시선이 갔다.

저 사람은 왜 여기 왔을까.

빵을 사러 온 게 아니다. 커피 한 잔이 목적도 아니다. 저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다. 갈 곳이 없어서, 아니면 가야 할 곳 앞에서 멈춰버린 사람.

순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나님,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평안을 주세요.'

짧은 기도였다. 습관처럼 올리는 기도. 그녀는 늘 이랬다. 손님들 중에 유독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났다.

남자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커피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식어버린 커피.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가게 안으로 노을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남자의 옆얼굴에 주황빛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순희는 멈칫했다.

저 얼굴.

노을빛 아래서 드러난 옆얼굴의 윤곽이... 누군가를 닮았다. 아니, 누군가라기보다는...

순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

그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남자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순희가 말했다.

"또 오세요."

남자가 멈칫했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잠시 정지한 것처럼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문이 닫혔다.

순희는 창가 자리를 바라보았다. 식어버린 커피, 구겨진 냅킨,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만 원.

왠지 모르게, 그가 다시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순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낮에 왔던 그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어둡고, 지치고, 무언가에 짓눌린 눈빛.

그리고 노을빛 아래서 본 옆얼굴.

"설마..."

순희는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세상에 얼굴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몸을 돌려 눕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 사람이 내 가게에 들어온 게 우연일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깊은 잠이 찾아왔다.


그날 오후, 남자는 이 골목에 올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느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발길을 돌렸다. 아무 데나 걷자. 그냥 걷자. 그렇게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골목 끝에서 불어온 바람. 그 바람에 실려 온 냄새가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 따뜻하고, 고소하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침마다 데워주던 빵 냄새 같은 것.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쪽에 작은 빵집이 보였다.

'고마운 하루'.

그는 왜인지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 아니었을까.


[1장 끝]


📖 다음 장 예고
제2장: 30년의 무게 - 재혁의 과거, 그리고 아버지가 떠난 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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